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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여행 -박종호-

by 보거(輔車) 2008.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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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혹시키는 것들 삶, 풍경, 예술…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

박종호 글 사진

 

“이탈리아의 찬란한 햇빛이 내 삶의 모든 걸 바꾸었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의 저자 박종호의 고혹적인 여행 에세이.

“오, 나의 이탈리아!”

진정 아름다워 나를 고독하게 하는 곳,

15년 동안 20여 차례 찾은 풍미의 땅 이탈리아에서 낭만과 열정을 편력하다.

몇 해 전 그는 국내 최초의 클래식 음반 전문점 ‘풍월당’을 차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본업인 정신과 전문의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 ‘평론가’로 더 유명해졌다. 그의 이런 진가는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불멸의 오페라』『유럽 음악축제 순례기』 등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 이 책들을 읽어보면 그가 그동안 음악을 얼마나 사랑해왔는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책들의 최대 장점은 ‘현장감’에 있다. 그는 그 음악이 탄생했던 곳, 그 음악이 무대에 올려지는 곳, 그 음악가가 죽음을 맞이했던 호텔 등을 직접 방문한 뒤 책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길 위에 있다. 지금 그는 1년에 몇 달 정도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여행을 떠난다. 아니 늘 어디론가 떠날 궁리만 한다. 생업에 지장이 있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한때 의사를 때려치우고 ‘풍월당’만을 운영할 생각도 했으니까. 그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구속받지 않으며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을 직접 그 현장에 찾아가서 향유하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여행자의 고독감을 즐기고 있다.

한때 그는 음악, 특히 오페라가 없으면 못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음악을 듣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오페라 공연 하나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 시골 구석구석을 다 뒤졌고, 때로는 오스트리아의 낯선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으며, 미친 듯이 독일 바이로이트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음악이 있는 곳을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기만의 여행법과 음악 감상법을 터득했다. 처음에는 음악을 듣고 찾기 위해 떠났지만 지금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음미하고 향유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자신을 매혹시키는 삶, 풍경, 예술을 편력하기 위해. 자신의 고독함과 마주하고,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브람스의 “자유를 원하면 고독을 감수하고, 고독을 원치 않으면 자유를 포기하라”라는 말처럼.

우리 시대 예술 애호가 박종호의 이탈리아 기행

“내 여행의 본질은 예술에 있었다. 이탈리아 곳곳은 인류 최고의 예술이 지천에 흐드러진 곳이다. 예술을 찾아서 이탈리아의 방방곡곡 이름 모를 마을을 전전했다. 그곳에서 나는 위대한 인간이 창조한 수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맛보고 그리고 감격했다.”

그가 이제 본격 여행서를 펴낸다. 방문지는 이탈리아. 그가 가장 많이 갔고, 가장 많이 향유했던 곳. 그는 이탈리아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탈리아 음악으로 처음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오페라가 가장 대중적으로 행해지던 곳도 이탈리아였다. 그는 틈만 나면 이탈리아를 찾아가 음악을 듣고, 예술을 음미하고, 진정한 삶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이 서서히 변해가는 걸 느꼈다. 그의 가치는 이제 성공이나 일에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자유와 예술에서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풍월당’을 차리게 되었고, 더욱더 음악과 오페라를 비롯해 문학, 미술, 건축, 영화 등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숱한 책에서, 음악에서, 그림에서, 사진에서, 영화에서 늘 이탈리아를 그리워했고, 수도 없이 꿈꾸어왔다. 얼마나 많은 음반을 들으며 이탈리아를 상상해왔던가? 그러나 쉽게 가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공부나 세상일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여행 상품을 통해 처음 이탈리아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여행은 실망스러웠고, 그 뒤부터 그는 자신만의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처음 그가 이탈리아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오페라 때문이었다. 그는 오페라를 보기 위해 조그마한 시골 구석까지 찾아 다녔다.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지 않은 부세토에 가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베르디의 동상을 발견한 뒤 함께 슬퍼했고, 겨우겨우 찾아간 소도시 토레 델 라고에서 푸치니의 사치스런 삶을 엿보며 살짝 웃음 지었다. 또 베로나 오페라 축제에서 2만 여 명의 관객과 함께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했다. 대형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오페라는 그야말로 장관이었고, 자신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줬던 이탈리아를 계속 찾아갔다. 15년 동안 20여 차례. 거의 매년 이탈리아를 찾은 셈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의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매혹시키는 삶과 풍경을 음미하기 위해.

그래서 박종호는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 애호가이다. 예술을 향유하고, 즐길 줄 알고, 또 그것을 대중과 함께 음미하는 걸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여기 그의 첫 번째 여행책이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예술의 현장과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예술과 예술가가 이 책의 주인공은 아니다. 예술의 현장을 여행하고 있는 박종호가 주인공이다. 그는 예술이 탄생된 그곳을 찾아가 음미하고 사색한다. 이탈리아의 시골까지 가서 그곳에서 어떻게 예술이 탄생되었는지를 목격하고 자신만의 느낌으로 되새긴다. 그리고 그곳의 풍경을 소유하며 자신만의 색다른 여행법을 즐기는 것이다.

박종호만의 사치스런 여행법, 이탈리아의 재발견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떠나 진정한 나를 만나다

그 이탈리아는 새롭고 신선하다. ‘이탈리아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박종호는 수천 년 동안 각 도시를 통해 발전해온 이탈리아의 특성을 제대로 잡아낸다. 이탈리아는 중앙집권적인 나라가 아니라 도시가 중심이 되어 발전해왔다. 그래서 각 도시의 특징이 천양각색이다. 곧 로마를 보았다고 해서 이탈리아를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박종호는 베네치아에서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고독함’을 발견해내고 혼자서는 절대 베네치아에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밀라노에서는 쉽게 감동을 허용하지 않는 예술의 신전 라 스칼라의 자존심을 설명해주고, 피사에서는 기적의 광장에 펼쳐져 있는 두오모와 사탑, 세례당의 절묘한 조화를 보고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또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에 대해 연신 감탄을 내뱉는다. 지성으로 번뜩이는 자긍심의 산실 볼로냐에서는 시민의식과 지식인의 역할을 다시 되새기고, 로마에서는 평범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분수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예술가들을 찾아가는 여정도 독특하다. 박종호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베르디, 푸치니, 카루소 등의 행적을 뒤좇는다. 그곳들은 모두 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지 않은 소도시이다. 이는 음악 애호가로서의 박종호의 열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카루소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묵었던 호텔을 찾아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박종호이기 때문에 가능한 여행이다. 그 호텔방에서 박종호는 카루소의 노래와 카루소의 일생을 생각하며 예술과 예술가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깨우친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주리’(푸른색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푸르디푸른 바다. 베네치아, 비아레조, 나폴리, 소렌토, 포시타노, 바리… 그 푸른 바닷가에서 박종호는 풍경을 음미하고, 낭만을 편력한다. 이탈리아의 찬란한 햇빛을 만끽하며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생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죽음을 생각한다. 바로 이 아드리아 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러나 이방인인 내가 여기서 죽을 확률은 거의 없다. 나는 내가 죽거든 유골을 베네치아 앞 바다,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에 뿌려달라고, 그때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두곤 한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유언이며 지금 내가 바라는 마지막 사치이다. 지상에 왔던 흔적 같은 것은 필요 없다. 다만 내 영혼이 아드리아 해에 누워서 그 핑크색 가로등의 고독을 계속 음미하고 싶을 뿐이다.”

 

■ 본문 맛보기-세 곳의 여행지

베네치아-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런 죽음

“그러나 이곳에서 가장 무서운 것, 방문자에게 갑자기 엄습하는 것은 고독이다. 낮의 화려한 장식과 사치스러운 분위기, 온 골목들을 휘감은 수많은 명품과 공예품, 귀금속과 유리그릇들 속에서 흥청거리던 도시는 저녁에 관광객들이 빠져나가면 텅 비어버린다. 조용해진 산 마르코 광장이나 황량한 해변에서 다가오는 것은 이방인의 뼈 속까지 시려오는 고독이다. 이곳은 사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고독의 도시다.”

베네치아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곳이다. 즉 베네치아는 가장 마지막에 들르는 곳이다. 그곳을 먼저 간다면 다른 도시들이 무의미해질 수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베네치아에 혼자 오지 마라. 꼭 누구와 함께 오라. 왜냐하면 누가 당신 옆에 있더라도 그에게 쓰러질 것이므로……” 하지만 무너지면 어떠랴. 베네치아가 아닌가? 무너져도, 속아도, 쓰러져도 좋은 곳. 그럴 가치가 있는 도시가 베네치아다. 아니 당신이 누구의 어깨에라도 무너지거나 쓰러질 곳을 찾는다면, 그곳은 베네치아가 되리라.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의 상징은 곤돌라이다. 가장 화려했고 가장 퇴폐적이었던 시절의 상징 곤돌라-그러나 그 곤돌라들은 모두 검은색이다. 스키아보니 해안에 늘어선 선착장에 가보면, 검은 레커 칠을 한 곤돌라들이 마치 미끈한 장소하늘소처럼 부두에 누워 있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 때마다 곤돌라들은 서로의 미끈한 옆구리를 부딪치면서 몸 전체를 요동치지만, 결국은 자신을 찾아줄 손님을 기다리면서 얌전히 엎드려 아드리아 해의 물살을 즐기고 있다. 함께 탈 때는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것이 곤돌라이지만, 혼자 탈 때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것이 곤돌라다. 곤돌라를 타고 혼자서 들어가는 좁은 밤의 운하는 절대 고독으로 들어가는 의식과도 같다.

그때 나는 고독을 치열하게 맛본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과 향락의 잔재는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한편 그것은 너무나 고독한 여정이다.

산 미켈레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묘지가 되었다. 발레 역사상 최고의 감식가였으며 흥행가였고 예술의 천재를 발굴하는 데 천재였으며 ‘발레 뤼스’의 창시자였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1929년 이곳에 묻히기를 희망한 이후로 이 묘지는 급격히 유명해졌다. 그러니 80년 전의 일이다. 디아길레프를 이어서 러시아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 쇤베르크의 사위이자 이탈리아의 현대음악의 대가 루이지 노노 등이 모두 이곳을 자신의 영원한 집으로 선택하였다.

내 삶에 마지막으로 하나의 사치를 허용하다면 나도 이곳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그렇게 좋아하던 베네치아를 바라보면서 아드리아 해에 누울 수 있다는 것만큼 더 멋진 일이 있을까? 하지만 어쩌면 이곳은 가끔 찾아오는 나그네이기에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이곳은 내가 다녀가는 곳이지, 여기에 영원히 머무를 자격은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밀려온다. 나그네에게는 이토록 아름다운 안식처가 어울리지 않는다.

부세토-베르디의 슬픈 표정을 찾아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부세토에 베르디 광장이 있다. 그 광장에 베르디의 동상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면 표정에 슬픔이 깃들여 있다. 왜 베르디는 저렇게 슬퍼하는 것일까?

그는 아버지를 세 번 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는 어린 베르디에게 음악 공부를 시킬 만한 교양도 재력도 없었다. 그런 베르디의 소질을 알아본 것은 가게에 술을 대어주던 상인이었다. 바레치라는 사람인데, 그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후원자였고 음악을 사랑하는 애호가였다. 결국 바레치는 베르디를 작곡가로 키웠으며, 딸까지 내어주어 그를 사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최고의 후원자가 되었다. 든든한 후원자의 사위가 되고 예쁜 신부까지 얻은 베르디, 하지만 마음속에는 왠지 친아버지를 버렸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한 베르디는 입신의 꿈을 안고 밀라노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몇 달 사이에 부인 마르게르타과 두 아이를 모두 병으로 잃는 큰 불행을 당한다. 실의에 빠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 당시 유명한 소프라노였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다. 그들의 재혼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늦게야 결혼했다. 이번에 베르디는 제2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바레치를 버린 심정이었다.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어린 베르디가 성당에 다니던 시절, 신부님은 걸핏하면 베르디를 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베르디는 신부님이 너무 싫었다. 그는 기도할 때면 “하느님, 벼락이라도 쳐서 신부님 좀 데려가세요”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런 어느 날 성당에 벼락이 떨어져서,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러니 베르디는 세 아버지를 버린 셈이다. 친부, 양부, 그리고 신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집착과 애증은 베르디의 작품 속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때까지 오페라라는 것은 단순히 남녀의 수평적인 사랑을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존재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두 남녀의 사랑에 끼어든다. 그 많은 베르디의 아버지들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표현되니,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비로소 바리톤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이룬 베르디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낙향이 아니라 금의환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세토에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인 스트레포니 때문이었다. 부세토의 작은 시골 사람들은 베르디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겼으며, 동시에 아직도 그를 바레치의 사위로 여겼던 것이다. 마을의 영향력 있는 유지의 사위이자 그가 키우다시피 한 인물이 밀라노의 잘 나가는 여가수와 사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부세토 사람들은 자기 고장이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베르디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세토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서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했다. 자랑스러운 그들의 아들이자 사위인 베르디를 기념하여…… 이렇게 하여 이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오페라하우스 ‘베르디 극장’이 문을 열었다. 극장이 오픈했을 때 마을 대표들은 베르디에게 감사와 화해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베르디 부부의 전용좌석을 만들어서 평생 동안 언제나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베르디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베르디 극장은 바로 베르디 광장의 베르디 동상 뒤편에 있다. 그는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그렇듯 복잡한 심정의 표정으로 베르디 광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베르디 동상이 앉은 베르디 광장 반대편에 있는 건물이 바로 바레치의 집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동상을 앉힌 것일까?

소렌토-그 남자 카루소를 찾아서

절벽 바로 위에 유난히 눈에 띄는 호텔이 하나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호텔의 하나인 그곳에서 굳이 하룻밤을 지내려고 한 것은 나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남자를 찾아가는 중이다.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성악가이며, 지난 100년 동안 오페라계에서 최고의 스타 테너였던 엔리코 카루소(1873~1921). 그는 바로 소렌토 만 건너 저편에 있는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성공하였고 뉴욕의 오페라계를 석권하였으며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에 사상 최초로 아리아를 불러 녹음하였던 그. 그는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며,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감동을 선사하였다.

은퇴한 카루소는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카루소는 정작 고향 나폴리가 아니라 나폴리가 바라보이는 소렌토에 마지막 거처를 잡았다. 아마 카루소는 고향이 좋기는 했겠지만, 그 복잡하고 사람이 부대끼는 나폴리에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서민적이고 사람도 좋지만 간섭도 잘하는 그들 사이에서 살기에 카루소는 너무 유명하였고 너무 돈이 많았으며 너무 세련되어버린 것이다.

그 카루소가 자리 잡은 숙소가 바로 이 호텔이었다. 그는 이 엑셀시오르 그랜드 호텔 4층의 전망이 좋은 방에 유유적적하게 살면서 죽을 때까지 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원하던 대로 영면하였다.

방문을 열었을 때의 감격이란! 덧문이 닫혀 있고 불도 켜지지 않은 방에 내가 먼저 들어섰다. 먼지는 아닌데, 마치 허공에 미세한 입자들을 뿌려놓은 듯 어둠 속의 희뿌연 공기 속에 선다. 친절한 빈첸초가 커튼을 걷고 덧문을 하나씩 열자, 방 안에는 각 덧문짝의 크기만큼씩 1미터 정도의 크기로 조금씩 조금씩 엷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방 안의 입자들이 하나씩 깨어나는 듯 전체의 방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눈앞에 드리워져 있던 엷은 망사가 벗겨지는 느낌이다. 아, 카루소가 마지막을 살았던 곳. 그가 누워서 병구(病軀)를 눕혔던 침대. 비록 침대 위에는 두꺼운 커버가 씌워져 있었지만, 그 위에 카루소의 몸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빈첸초가 연 문을 통해서 바람이 들어온다. 바닷바람. 지중해의 바람은 꼭 어떤 이유가 있는 것만 같다. 바람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바람을 따라 발코니에 나선다. 아, 아마도 이 호텔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위치이리라. 저 바다 건너편에 높고 잘생긴 산이 있다. 베수비오 산이다. 그 왼편 아래로는 하얀 집들이 해안을 따라 늘어선 큰 도시가 보인다. 나폴리다. 나폴리 전체가 이렇게 잘 보일 수가! 건너편 해안 가득히 희고 아름다운 도시가 보인다.

나폴리에 가지 않은 카루소를 고향 사람들은 야속하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매일 이 방에서 사랑하는 고향 나폴리를 아침저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해가 찬란하게 떠올라 지중해의 수면이 반짝이는 아침에도, 어둠이 내려 밤하늘 가득히 별들이 뿌려져서 산타 루치아 항구의 등불들과 함께 빛나는 밤에도 그는 내내 나폴리를 사랑하였던 것이다. 발코니에 나서니 바로 카루소가 불렀던 노래가 떠올랐다. 바다 건너 보이는 고향, 어떤 사연이 더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갈 수 없는 고향. 다만 바라보기만 했던 고향. 그래서 그는 고향을 더 사랑하였을 것이다.

■ 차례

머리말

프롤로그

제1장 자연 속 인간이 이룬 조화의 극치

베네치아 :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고독함

비첸차 : 돌로 이루어낸 인간 창의의 정수

베로나 : 아름다운 고장, 감동과 치유의 도시

시르미오네 : 눈앞에서 드러나는 잊었던 동화들

제2장 풍요 속에서 빛나는 문화의 보석들

밀라노 : 높은 안목을 요구하는 오만한 세련미

부세토 : 영광의 그림자, 회한의 그늘

볼로냐 : 지성으로 번뜩이는 자긍심의 산실

제3장 구릉마다 피어나는 르네상스의 꿈

피렌체 : 어디나 예술이 넘치는 낭만의 거리

시에나 : 산에서 유혹하는 중세의 도성

피사 : 과거의 영화와 현대의 열정이 공존하는 곳

토레 델 라고 : 호반에 피어오르는 예술가의 환영

비아레조 : 해변에 펼쳐진 아르누보의 신기루

제4장 끝없이 타오르는 태양과 정열

로마 :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문화의 전당

나폴리 : 여전히 아름다운 태양의 항구

소렌토 : 절벽에서 돌아보는 고단한 인생의 아름다움

포시타노 : 영감을 일깨우는 천혜의 절경

바리 : 지나간 역사 속에 홀로 당당한 그곳

에필로그

■ 저자 소개

박종호

정신과 의사…
정신과 전문의로서 병원을 운영해왔으며, 한양의대와 한림의대의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청담 박종호 정신과 의원 원장이다.

음악 저술가, 오페라 평론가…
여러 매체에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에 관한 칼럼을 기고해왔으며, 특히 오페라 평론가로서 비평과 해설 등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음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국내 최초의 클래식 음반 전문점인 풍월당을 설립하기도 했다.

여행가…
인생의 최고 가치는 자유, 예술, 그리고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고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여러 예술 장르에 관심이 많으며, 세상을 다니면서 그것을 구경하는 자로서 일가견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놀이의 본령은 여행에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2』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 『불멸의 오페라 1, 2』 『박종호에게 오페라를 묻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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